청풍명월로 세계를 품은 생거진천

박상배 승인 2021.09.17 10:25 | 최종 수정 2021.09.17 11:43 의견 0

순천향에너지시스템학과 초빙교수(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충청도를 한마디로 평한 말이 청풍명월(淸風明月)이다. 세상인심이라지만, 세력 있을 때는 아첨하며 따르고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염량세태(炎涼世態)속에서 결백하고 온건한 품성이 배어나는 선비정신, 고고한 양반정신도 이 세평의 한 아류다.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은 일찍이 충청도를 포함해, 경우가 바르고 얌전하다고 하여 서울·경기도 사람을 ‘경중미인(鏡中美人)’, 전라도를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 강원도를 암하노불(岩下老佛), 황해도를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를 산림맹호(山林猛虎) 등으로 각기 평했다.

그런 뒤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함부로 평하기를 주저하자, 태조는 아무 말도 좋으니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함경도인의 기질을 묘사한 글자가 이전투구(泥田鬪狗)다.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만 말뜻 그대로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몰골 사납게 싸움’을 이르는 말이다.

즉,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볼썽사납게 싸우는 것’이라는 의미로 확대 발전했지만,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처럼 강인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개에 비유했으니 이성계가 기분 좋을 리 없다. 그가 언짢은 표정을 짓자 정도전은 ‘돌밭을 가는 소(石田耕牛)’와 같은 우직한 품성도 갖고 있다고 해 태조의 기분을 겨우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드나무’와 같은 풍전세류(風前細柳)나 ‘바위 아래 있는 늙은 부처’를 지칭한 암하노불(岩下老佛), 그밖에도 ‘봄 물결에 던지는 돌’이라는 뜻의 춘파투석(春波投石) 등은 해석하기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느낌도 다를 터이다.

그럼에도 조선 팔도 각 지역 사람들의 기질을 압축적이고 재치있게 담아낸 ‘사자평(四字評)’은 지역색이란 논란을 떠나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그 중에서도 청풍명월은 구름에 달 가듯 무욕(無慾), 양보(讓步),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못해 느려터지고 답답함을 에둘러 말하기도 한다. 피차 의도가 어찌됐든 화자나 청자 모두 충청도 사람들이라면 긍정적이고 애정 담긴 표현은 이보다 더없다.

때마침 충북 진천군민이 25일, 정부가 제시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품기로 했다. 작년 중국 우한 코로나 대피 교민들을 받아들인데 연이은 인류애적 접근과 포용, 넉넉한 충청도 인심이 국내를 넘어 지구촌의 관심이 됐다. 그동안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해왔고,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한 아프간 현지인들에게 정부가 피난처 제공으로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멀리 살필 필요도 70년 전, 6·25 전쟁을 겪으며 국민 전체가 난민이 되어 무력의 공포와 생사의 기로를 헤맸던 비참한 아픔을 간직한 우리가 아닌가. 박윤진 진천군 덕산읍이장협의회장은 “6·25전쟁 당시 우리 국민도 (인민군 치하에서)큰 고통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아프간 조력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지자체와 협의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유엔의 적극적인 구조와 구호의 손길을 잊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어엿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인도적 차원에서 아프간인들을 지원키로 한 것은 잘된 결정이다. 코로나 팬데믹 공포와 걱정 속에서도 ‘편하게 지내다 가시라’는 진천지역 주민들의 환영현수막이 태극기 못지않게 자랑스럽다.

아프간 조력자들을 수용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나자 일부 주민들은 고국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게 될 아프간인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세 자녀를 둔 40대 여성은 진천군청에 “어린 자녀가 있는 아프간 입국자를 위해 장난감과 간식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본래 진천 땅은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혼령으로 남의 육신을 살아가야 했던 ‘추천석’을 바탕으로 옛말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고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덕성스럽고 효행스런 이야기로 귀가 더 솔깃하다. 옛날 진천군에 사는 ‘허생원’이라는 사람의 딸이 경기도 용인시로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으나 불행히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곧이어 남편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딸은 다시 친정인 충청북도 진천군에 돌아와 아들을 낳았다.

결국 아들이 두 명이 되었는데 각각 충청북도 진천군의 아들과 경기도 용인시의 아들이었다. 이후 허생원의 딸은 개가를 하였는데, 용인에 사는 큰 아들이 진천으로 개가한 어머니를 모시고자 했으나 진천의 작은 아들이 극구 반대했다. 큰 아들은 하는 수 없이 관아에 소송을 냈다.

진천현감은 이 이상한 재판에 깊이 고민을 하다 이렇게 판결했다.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진천에 의부가 계시니 거기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 모시도록 하라.”고 결론을 내줬다는데서 유래된다. 진천현감의 지혜는 사자성어를 남겼으니, 두 여인 사이에 친자를 다퉜던 ‘솔로몬의 판결’ 못지않다.

이 말은 농업이 으뜸이었던 시절에 진천은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뭄과 큰물이 들지 않아 농사가 잘돼 생거진천(살려거든 진천 땅에 살고) 이라 했고, 용인은 사대부들의 유택이 많은 산세가 준수한 땅이어서 사거용인(죽은 후 용인 땅에 묻히라)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그래선지 경기 용인지역에는 유명인들이 유택이 유독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선영,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일가의 종중 묘도 있다. 이곳에는 정 전 회장의 장남인 정몽필 인천제철 회장의 묘가 있다.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죽어서 묻혀야 후세에 복을 가져온다는 속설 때문에 유명인들의 무덤이 많다.

종교계에서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가 모현면 천주교 공원묘원에 있다. 김 추기경의 묘소는 선종 직후부터 지금까지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문화계에서는 박목월 시인이 대표적이다. 모현면 용인공원묘원에 있는 박 시인의 묘소에는 ‘시의 정원’이 조성돼 문학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의 조부 묘도 양지면에 있었지만 지금은 이장한 상태다. 이밖에도 장차관급 이상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의 묘소도 즐비하다.

어찌됐던, 생거진천이 지구촌 이슈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진천은 ‘살아서 진천’이라고 사후가 아닌 산 사람들이 당대발복(當代發福)하는 고장이다. 용인과 달리 세계의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던가. 세계의 사람이 드나들고, 지구촌이 지대한 관심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졸지 고향을 등지고 지구촌을 떠도는 망국의 난민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민다.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들며 곳곳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동난민 ‘디아스포라(Diaspora)’를 충청도의 넉넉한 인심으로 크게 맞이하자. 아픔과 불안을 따듯한 마음으로 감싸 주자. 살아있는 사람의 상처받은 영혼, 지구촌에서 고통받는 세계인의 영혼을 달래고 위로해줄 생거진천을 응원하며 기대한다.

※도움말
조선의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이 우리나라 8도(道) 사람의 특징을 4글자로 표현
충청도 사람들은 ‘맑은 바람, 밝은 달과 같은 품성’이라는 뜻의 청풍명월(淸風明月)
경기도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미인과 같다’ 하여 경중미인(鏡中美人)
전라도 사람들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드나무’와 같은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 사람들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로 비유한 송죽대절(松竹大節)
강원도 사람들은 ‘바위 아래 있는 늙은 부처’로 표현한 암하노불(岩下老佛·
황해도 사람들은 ‘봄 물결에 던지는 돌’이라는 뜻의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 사람들은 ‘산속에 사는 사나운 호랑이 같다’고 평한 산림맹호(山林猛虎)
함경도 사람들은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처럼 강인하다’는 뜻의 이전투구(泥田鬪狗).
‘돌밭을 가는 소’와 같이 우직한 성품의 석전경우(石田耕牛)’고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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