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자리는 원래 잠시 맡아 쓰는 의자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 의자를마치 평생 소유권이라도 얻은 것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책임을 하고, 잘못이 드러나면 사과보다 변명부터 찾는다. 모든 실패는 “상황 탓”, “전임자 탓”, “언론 탓”이 된다.
이렇게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았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이미 공동체의 신뢰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묵묵히 결과에 책임지고 물러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사건이 터져도, 정책이 망가져도, 조직이 흔들려도 사라지는 건 책임이 아니라 브리핑 자료뿐이다. “내가 아니어도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이 하나의 면허처럼 쓰인다. 그 사이, 자리는 남고 존경은 바닥까지 소모된다.
오래 버티는 사람이 유능한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고, 더 젊은 감각과 새로운 상상력이 들어올 수 있도록 스스로 물러나는 이가 진짜 어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자리를 지키는 것’을 충성으로,‘스스로 그만두는 것’을 죄인의 고백처럼 취급한다. 그러니 세대교체는 구호로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낡은 습관과 낡은 사람들만 재탕·삼탕 된다.
아름다운 퇴장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다음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결단이고, 공동체 앞에서 스스로를 절제하는 품격이며,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 입에서 좋은 이야기로 회자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다.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 보다 나라와 동네, 조직과 팀의 내일을 더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떠난 뒤에도 그 이름은 욕이 아니라 감사와 존경으로 불린다.
이 문제는 특별한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관공서, 공공기관, 학교, 협회, 재단, 회사…이름만 다를 뿐, 구조는 비슷하다.
자리가 사람을 잡고, 직책이 인격을 대신한다. 위로 갈수록 “언제 물러나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더 버틸 것인가”만 계산한다.
그 사이 젊은 세대는 “내가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는 허탈감 속에서 이 땅과 이도시를
떠나갈 준비를 한다.
떠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왜 아름다운가. 그 뒷모습에는 욕심 대신 책임이, 계산 대신 결단이, 변명 대신 존엄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짜로 배워야 할 것은 더 세게, 더 오래 버티는 기술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물러날 줄 아는 품격이다.
그 첫 번째 아름다운 뒷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이 나라는 비로소 새 얼굴, 새 생각, 새 희망을
진짜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